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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예금, 아직도 못 찾은 돈 — 예천의 한 노인이 겪은 ‘조흥은행 현금보관증 미지급 사건’

by 정보정보뀽 2025.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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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35년간 모은 피땀의 돈

경상북도 예천군에 사는 **김규정 씨(80대)**는 지금도 평생 마음속 응어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의 부친, 고(故) 김주식 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35년 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1만2,220엔을 손에 쥐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었죠.

1945년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김주식 씨는, 귀국 직후인 1946년 3월 5일, 거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조흥은행 예천 풍천지점에 예치했습니다.
그는 당시 은행으로부터 **‘현금보관증’**을 발급받았고,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 거주 김주식 씨의 일본 돈 1만2,220엔을 보관함을 증명한다.”

보관증에는 지점장 박종선의 서명과 조흥은행 직인, 그리고 “타인은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문구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 전쟁과 정책, 그리고 끝없는 기다림

하지만 평생의 피 같은 돈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1950) 이후 혼란 속에 은행 자료가 대부분 유실되었고, 김 씨가 찾아가도 “확인할 수 없다”며 지급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외화가 절실하던 시기,
정부는 엔화 인출을 제한했습니다.
은행은 “지금은 외화 반출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출금을 거부했고, 김주식 씨는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했으나 끝내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억울함은 결국 병이 되었고,
그는 1969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아들의 재시도, 그리고 또 한 번의 벽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아들 김규정 씨 전두환 정권 시절(1980년대) 다시 조흥은행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은행 측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금액이 커서 재무부 허가가 필요하다.”
“보관증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인출은 또다시 거부되었고, 김 씨의 손에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보관증 한 장만 남아 있습니다.


💸 그 돈의 현재 가치는?

당시 1만2,220엔은 1940년대 기준으로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거액이었습니다.
이를 환율, 물가 상승률, 화폐개혁 등을 반영하면 현재 가치로 약 40억~7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되며,
만약 76년간의 은행 이자를 더한다면 100억 원을 훌쩍 넘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 법과 도덕의 경계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예금 분쟁을 넘어,
**“국가와 금융기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 전쟁으로 인한 자료 유실은 불가항력이었을까?
  • 외화 규제 정책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한 것은 아닐까?
  • 현금보관증이라는 공식 문서의 법적 효력은 지금도 유효할까?

80년이 흐른 지금까지, 김규정 씨 가족은 여전히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 중입니다.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모인 돈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버린 이 사건은,
잊혀진 시대의 상처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 맺음말

한 세대의 희생으로 쌓은 돈이 80년 넘게 주인을 찾지 못했다는 건,
우리 사회가 되돌아봐야 할 역사적 부채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누군가의 오래된 종이 한 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한 인간의 삶과 존엄을 바라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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